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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냉전의 일부) 1966년 미군 휴이 UH-1D 헬리콥터 날짜 1955년 11월 1일 – 1975년 4월 30일 장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결과 북베트남 승리 공산주의자들의 남베트남 점령 크메르루주의 캄보디아 장악 교전국 반공군 베트남 공화국 미국 대한민국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뉴질랜드 타이 크메르 공화국 라오스 왕국 비공식 지원국 중화민국 공산군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콩 크메르루주 파테트라오 비공식 지원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응오딘지엠† 응우옌반티에우 응우옌까오끼 응오꽝쯔엉 럼꽝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로버트 맥나마라 웨스트모어랜드 크라이턴 에이브럼스 프레더릭 웨이언드 엘모 줌월트 존 폴 밴 로빈 올즈 박정희 채명신 이세호 해럴드 홀트 타놈 끼띠카쫀 키스 홀리오크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론 놀 수바나 푸마 호찌민† 레주언 쯔엉찐 응우옌찌타인 보응우옌잡 팜훙 반띠엔중 쩐반짜 레득토 동시응우옌 레득아인 쩐도 응우옌반또안 호앙민타오 응우옌민쩌우 쩐테몬 쭈프엉도이 쯔엉묵 보민찌엣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폴 포트 수파누봉 병력 ~1,200,000 (1968년) 남베트남: ~650,000명 미국: 553,000명 (1968년) 대한민국, 뉴질랜드, 타이, 필리핀: ~61,800명 오스트레일리아: 49,968명 (1962년-1973년) ~520,000 (1968년) 북베트남: ~340,000명 중화인민공화국: 170,000명 (1969년) 소비에트 연방: 3,000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00명 피해 규모 베트남 공화국 사망: 220,357명, 부상: 1,170,000명 미국 사망: 58,159명, 2,000여명 실종, 부상: 303,635명 대한민국 사망: 4,407명, 부상: 11,000명 타이 사망: 1,351명 필리핀 사망: 1,000명 오스트레일리아 사망: 520명, 부상: 2,400명 추정 뉴질랜드 사망: 37명, 부상: 187명 사망 합계: 285,831명 부상 합계: ~1,490,000명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콩 사망/실종: 1,176,000명, 부상: 600,000명+ 중화인민공화국 사망: 1,446명, 부상: 4,200명 소비에트 연방 사망: 미상, 24명 이상 사망 인정함. 사망 합계: ~1,177,446명 부상 합계: ~604,000명+ 미군의 EB-66 디스트로이어 1대와 F-105 썬더치프 4대가 비엣민에 폭격을 가하고 있다. 미군 병사가 베트콩을 찾아 가택을 수색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베트남어: Chiến tranh Việt Nam/ 戰爭越南)은 1955년 11월 1일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시작된 전쟁이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공산군에 의해 함락됨으로서 종전되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대한민국군 32만명이 파병하여 5천명이 전사하고 31만명이 생존 귀환하였다. 목차 1 경과 2 배경 2.1 1949년까지의 배경 2.2 1950년 이후 2.2.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종식 2.2.2 미국의 남베트남 개입 2.2.3 미국과 북베트남의 대결 2.3 통킹 만 사건 3 베트남 전쟁 3.1 마닐라 정상 체제 3.2 평화협정 4 남베트남의 항복 5 결과 6 대한민국군 참전 7 관련 대중매체 7.1 문학 작품 7.2 영화 7.3 드라마 8 같이 보기 9 바깥 고리 10 참고 문헌 11 주석 편집 경과 1955년부터 1975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있는 반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결국 반전 여론과 불투명한 전세에 미국은 휴전 협정을 맺고 베트남 전역에서 퇴각하지만,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베트남 해방전선은 전쟁을 재개하여 사이공을 북베트남군이 점령하고 남베트남 정부 대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세워지면서 끝이났다. 대한민국에서는 한자를 한국어식으로 음차한 월남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쟁으로 남베트남 민간인 사망자 수는 1,581,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캄보디아 민간인 사망자도 70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또한 라오스 민간인 사망자 수도 5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미군 사망자는 대략 6만여 명이다.[1], 대한민국에서 참전한 군인도 5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군이 사용한 무기와 화학약품으로 인해 피해자 본인과 자녀들이 장애를 얻은 사례가 속속 집계되고 있다. 편집 배경 편집 1949년까지의 배경 베트남의 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편집 1950년 이후 편집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종식 비엣민 군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거의 궤멸시켰고, 그해 제네바에서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프랑스는 제네바에서 맺은 휴전 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프랑스군만 철수시킴으로써 베트남 전국에서 실시하기로 했던 총선거가 결국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다. 편집 미국의 남베트남 개입 이 때를 틈타 미국이 반공을 명분으로 남부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베트남 고딘디엠 정부의 독재가 계속되고, 가톨릭 신자인 고딘디엠 대통령이 불교를 탄압[3]하는 등 인권탄압이 심각해지면서, 베트남의 사회주의자들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고딘디엠의 독재에 분노한 베트남 시민들과 함께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불교 승려들도 분신항거로써 자신의 몸을 공양함으로써 고딘디엠 독재정권에 항의하였다. 편집 미국과 북베트남의 대결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남베트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됨에 따라 남베트남의 미군 주둔 병력도 계속 증가되었다. 호찌민을 지지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전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 것을 염려한 미국은 미군 주둔 병력을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비밀 군사작전을 통해 북베트남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편집 통킹 만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통킹 만 사건입니다. 통킹만 사건은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하면서 발발한 사건이다. 이 교전의 결과로 북베트남 해군은 어뢰정 3척이 손상을 입었고, 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를 남겼다. 미해군은 구축함 1척과 항공기 1대에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전상자는 없었다. 본래 미국가안보국은 8월 4일 두 번째 교전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971년 6월 뉴욕 타임즈에 통킹만 사건의 두 번째 교전은 미국이 북베트남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것임을 시사하는 기사가 실렸다. 편집 베트남 전쟁 베트남 지역에 미군이 상륙하기 시작하고 이에 맞춰 북베트남군이 남하하면서 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제적인 정당성을 상실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참여했던 한국 전쟁과 달리 미군을 주축으로 대한민국, 중화민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타이, 뉴질랜드 등의 몇 개의 나라만이 전쟁에 참가했다. 베트콩의 평화통일 선전은 계속되었고 가족 간에도 생각이나 이념이 달라서 살상하는 일이 발생했다. 베트남인과는 별도로 원주민인 몽타나 족 등 소수 원주민들의 피해도 상당하였다. 베트콩 등 공산주의자들은 남베트남 군경과 미군 등 연합군의 단속을 피하여 게릴라전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밀림의 몽타나 족 등 원주민이 거주하는 동굴이나 초막 등에 은거하기도 하였고 미군이나 연합군이 도착이 예상되면 자발적인 밀고자들로 베트콩들의 단속이 어려웠다. 미국군 사령부는 북베트남의 주요지역을 폭격하고 남·북베트남 각지의 삼림에 은거한 게릴라들을 찾아내기 위해 곳곳에 고엽제와 제초제를 살포했다. 이에 맞서 북베트남군은 계속된 게릴라전을 통해 미군에 대항했다. 편집 마닐라 정상 체제 베트남 전쟁에 적극 참여했던 나라인 한국·미국·타이·필리핀·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7개국 원수들이 회동한 1966년 10월 24∼25일의 마닐라 정상회담에서는 베트남을 중심으로 점증하는 공산침략을 격퇴하려는 자유제국의 공동결의를 다짐하고 전쟁수행 과정에서나 분쟁해결 과정에서 참전국(參戰國) 간에 상호협의할 체제를 마련한 외에도 아시아·태평양 전역을 안전과 복지를 위한 하나의 협력체제로 발전시키려는 데 있어서 단합할 것을 다짐하였다. 아스팍 체제와 비슷하기는 하나 이 마닐라정상체제, 다시 말해서 베트남참전국 협력체제는 번영의 필수적 전제요건인 안전보장을 위해서 지역적인 집단방위(集團防衛) 노력에 보다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월남 참전국 외상회의는 1967년에 워싱턴에서 제1차 회의를 개최한 것을 기점으로하여 제2차 회의는 이듬해 워싱턴에서, 제3차는 1969년 방콕에서, 제4차는 1970년 사이공에서, 그리고 1971년의 제5차는 서울에서 각각 개최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반공 구축망을 다짐했다. 그러나 중국의 유엔 가입과 베트남 전쟁의 종결 기미가 나타나 참전국들은 자국의 독자적인 외교정책 추진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게 되어 후속적인 결속은 사라지고 말았다. [4] 편집 평화협정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의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미국의 키신저는 북베트남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 원조, 20억 달러는 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피폐한 북베트남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해방전선(베트콩 또는 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했다. 그리고 남베트남과 방위조약을 체결, 남베트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약속했다. 미군이 철수하지만 북베트남이나 해방전선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했다. 미군은 철수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무기를 월남에 양도했다.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세계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1973년 1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그해 봄에 사이공 정부의 외국 지원군들이 철수했다. 외견상 남베트남의 경제와 군사력은 북베트남을 앞서 있었으나, 그것은 미국의 지원때문이었다. 북베트남은 미국의 북폭때문에 거의 원시경제 상태에 있었으나, 프랑스, 일본, 미국 등의 세력과 싸워온 역전의 노장들이 지휘하는 군대의 사기는 높았다. 이에 반해 남베트남군의 고급 지휘관들은 대체로 프랑스 식민군대 출신이어서 국민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고, 정치 또한 군부의 잦은 개입과 부정부패로 계속 혼란상태에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평화통일 선동은 계속된 반면 남베트남의 대통령 티에우는 전적으로 외국 군대에 안보를 의존하였고, 티에우의 영부인은 그 와중에서도 해외에서 사치품 관광으로 이런 사건들은 민심을 공산당 계열로 이반시키는데 한 몫했다. 편집 남베트남의 항복 휴전협상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과 해방전선군측은 남베트남군과 곳곳에서 충돌했다. 남베트남 정치계의 혼란과 부패상은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고 군부의 정치개입도 여전하였다. 프랑스 식민지 군대출신의 남베트남 고급 장교들은 그 와중에서도 보급물자를 민간에 사사로히 불하하고 심지어 적에게까지 처분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의 정계가 소용돌이쳐서, 다시 베트남에 개입하지 못할 것을 확신한 북베트남은 무력통일을 결심했다.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북베트남군이 중부에서 총공세를 감행했다. 각지에 분산 고립돼 있던 남베트남군은 곳곳 에서 패퇴하여 밀리기 시작했다.북베트남군의 사이공 진격이 가까워옴에 따라 남베트남군이 크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 시점에서 응우옌반티에우가 이끄는 남베트남정부는 사이공 주변에 방어선의 구축을 서둘렀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북베트남 군대가 사이공에서 북동쪽으로 241km 떨어진 다리아크 지방 중심지인 반 메 투오트를 공격한 3월 10일에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의 저항없이 마을을 장악했으므로 남베트남의 북부 지역이 공산주의자의 수중에 떨어질 위험에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수많은 탱크의 지원으로 북베트남군은 1973년 1월의 휴전선을 형성했던 타치한 강을 건너 남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티에우 대통령의 "전선사수"라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저항도 없이 무질서한 퇴각만을 계속해온 남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의 북부 절반을 북베트남군에게 포기했다. 3월말 현재 남베트남군은 사실상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졌다. 정보소식통에 의하면 군대의 절반이 도망 중이고 북베트남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공격이 임박해 오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사이공은 패배주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다. 하노이측은 이런 와중에서 심리전을 병행하여 남베트남 정부의 권위와 지도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도탄에 빠진 국민을 외면하고 자신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던 티에우 대통령은 뒤늦게 “즉각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남베트남을 지키자.”라고 호소했으나 이미 민심은 떠난 지 오래였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북베트남군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계속된 반전운동과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미국이 다시 베트남전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띠엔중이 이끄는 북베트남군이 중부남베트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남베트남군은 지리멸렬,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1975년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북베트남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을 달리듯 일사천리로 남하할 때 부패했던 남베트남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조국을 탈출하고 있었다. 1975년 4월 21일 티에우 대통령이 남베트남군의 최후 전투였던 《쑤안록 전투》 패배뒤 하야한후 해외로 도피했고, 이전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재야 정치인 즈엉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5년 4월 29일 북베트남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라이케에 주둔중이던 남베트남군 제5사단장 레응우옌비 장군은 사이공 정부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북베트남군 포위망을 공격했다.이 와중에 남베트남군 제5사단은 북베트남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항전을 벌이다 궤멸당했다. 사단장 레응우옌비 장군은 권총으로 자결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남베트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정오가 지나서 북베트남 국기가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게양되었다. 9일 간의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사이공이 함락된 직후 해방전선을 중심으로 남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항복한 사이공 정부의 공식명칭은 베트남 공화국이었다), 이는 사실상 북베트남의 괴뢰정권이었다. 1976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통일에 합의하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편집 결과 불타고 있는 베트콩 캠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접수한 후 월맹군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월맹은 제일 먼저 월남에서 반공인사와 남베트남의 고위층과 유산가들을 숙청하였다.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 또한 비슷한 경로로 공산화되었다. 이를 두고 도미노 이론이라고 한다. 한편 통일 이후 정치적 변화와 경제난이 겹쳐 많은 수의 보트피플이 생겨났다. 이들중에는 통일 후 베트남 민족주의의 고양에 따라 재산을 몰수당한 중국계 화교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이들은 통일 후 1980년 중반까지 계속 베트남을 탈출했다. 초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많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경제적 이유가 더 컸다. 왜냐하면 베트남은 통일 후에도 중국과 캄보디아와 거듭된 전쟁으로 국방비부담이 증가한데다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에 경제의 재건은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이들을 정치적인 박해자라기보다는 경제적 난민으로 보아 외면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냉전이 완화되고 개혁개방으로 베트남의 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보트를 이용한 해외 망명자는 없어졌다. 종전 후의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15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이 중에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이라고 여겨진다. 편집 대한민국군 참전 퐁니·퐁넛 양민학살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입니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정부 하에서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쳐 파병하였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차관 마련 등의 군사, 경제적인 이유로 집요한 파병제안을 했으나,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할 경우 북한이 도발가능성과 중국,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원래 구상했던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중심으로 구상했던 베트남 지원 계획이 프랑스와 파키스탄의 반대로 어려움에 빠지자 1964년 5월 9일 《남베트남 지원》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게 된다.[5] 이에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 최초로 1964년에 국군을 해외 파병하여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한국이 공산침략을 경험한 국가로서 아시아지역의 안보와 자유수호를 위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한편 야당인사인 윤보선 등은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였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전세가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5년부터 휴접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파병하였다. 1964년 9월 11일 1개 의무중대(醫務中隊) 및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하는 등 후방지원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가 파병되었고,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의 조인으로 백마부대가 추가 파병하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지원단(軍需支援團) 및 백구부대 등 1개군단 병력을 파견하여, 베트남전 참전 8년간 총 31만 2천853명(최대 5만 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이로서 미국 다음으로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하였다. 파월 후 한국군은 월남평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한국정부는 월남문제에 대해서 큰 발언권을 행사했다. 1966년 10월 마닐라에서 열린 참전국 정상회담에서는 주도적 지원국가라는 점에서 박대통령이 기조연설 행하고, 월남평화방안으로서 협상전에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중지 등 구체적 성의를 보일 것, 월남의 의사를 존중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 파병기간 도중 미군의 미라이 학살사건과 비슷한 파월 한국(남한)군에 의한 빈호아사 커우 마을 학살사건(1966년 12월 6일, 131명 사망) 등의 민간인 학살들이 있었다. 월남전에의 참전은 한국으로서는 최초의 해외파병으로서, 이를 통해 국위(國威)를 선양할 수 있었다는데 의의가 있거니와 동시에 월남전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외화획득이라는 경제적 이득이 부수되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며, 한국안보 문제와 관련, 한국군 현대화를 골자로 한 브라운각서(1966년 3월)를 낳았고, 전투 경험을 얻었다. 반면, 파병된 대한민국군 32만명 중 5,099명의 사망자(KIA)와 11,232명의 부상자(WIA)[6]를 기록하고, 31만명이 생존 귀국하였다. 또한 159,132명의 고엽제 피해자를 낳았으며[7] 화공약품 후유증으로 귀국후 병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유명인사로는 전두환이 이 전쟁에 연대장의 신분으로 참전하였다.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일부 충당되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8]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미국의 월남전의 월남화계획에 발맞추어 한국도 점차 주월군 철수를 시작, 1973년까지는 완전히 철수했고, 그후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9]2005년 8월 26일 대한민국 정부가 베트남전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좀 더 정확한 역사적 검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문서에는 브라운 각서의 이행 상황과 1970년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주한 미국 대사인 포터의 증언 내용과 한국의 대응과정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10] 편집 관련 대중매체 편집 문학 작품 아포칼립스 나우 편집 영화 그린베레 (1968년), 존 웨인 주연 디어 헌터 (1978년) 지옥의 묵시록 (1979년), 말론브란도, 마틴 쉰 주연 람보: 퍼스트 블러드 (1982년) 실버스타 스탤론 주연 지옥의 7인 (1983년), 진 핵크만 주연 킬링필드 (1984년) 플래툰 (1986년) 햄버거 힐 (1987년) 풀 메탈 자켓 (1987년) 굿모닝 베트남 (1987년) 로빈 윌리엄스 주연 플래툰 리더 (1988년) 7월 4일생 (1989년) 톰 크루즈 주연 전쟁의 사상자들 (1989년), 마이클 J 폭스, 숀 펜 최후의 출격 (1990년) 하얀전쟁 (1992년) 안성기, 허준호, 이경영 주연 포레스트 검프 (1994년) 위워솔저스 (2002년) 멜 깁슨 주연 알포인트 (2004년) 감우성 주연 님은 먼곳에 (2008년) 수애 주연 편집 드라마 머나먼 정글 (1987년~1991년) 머나먼 쏭바강 (1993년~1994년) 편집 같이 보기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통킹만 사건 고엽제 인도차이나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캄보디아 내전 라오스 내전 킬링필드 론 놀 폴 포트 중국-베트남 전쟁 편집 바깥 고리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국방부 베트남 전쟁 국방부 베트남전쟁 통계 http://www.stopusa.be/scripts/texte.php?section=CL&langue3&id=24471 http://www.monde-solidaire.org/spip/article.php3?id_article=2295 베트남 참전 사망자수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편집 참고 문헌 에세이 세계사, 현대편/백산서당 편집 주석 ↑ 김명곤. “미국이 '전쟁광' 된 건 베트남 때문 - [해외리포트 월남전 패전 30년, 미국에 무얼 남겼나]”, 《오마이뉴스》, 2005년 5월 18일 작성. 2008년 3월 26일 확인. ↑ 김명곤. “[베트남 리포트 한국군 주요 전투 - 8년간 1,100여회 전투 전사자만 5,000명 넘어]”, 《한국일보》, 2005년 4월 27일 작성. 2008년 3월 26일 확인. ↑ 《세계종교사입문》/청년사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마닐라 정상체제의 기능변모〉 ↑ 군사편찬연구소 (2005년 10월 28일). 한국군 파병의 배경은?. 국방부. ↑ http://www.imhc.mil.kr/imhcroot/upload/resource/V14.pdf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2007년 11월 30일). 고엽제 후유증 환자 등 처리현황. ↑ 김수행,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월남파병〉 ↑ 정준영 기자. “<베트남전> 브라운각서와 사이밍턴 청문회(재송)”, 《연합뉴스》, 2005년 8월 26일 작성. v • d • e • h 냉전 서방 국가 · 동방 국가 · 비동맹 운동 1940년대 얄타 회담 · 언싱커블 작전 · 포츠담 선언 · 고젠코 사건 · 1946년 이란 위기 · 국공 내전 · 그리스 내전 · 트루먼 독트린 · 유럽 부흥 계획 ·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 · 티토-스탈린 결별 · 베를린 봉쇄 · 동구권 · 몰로토프 플랜 1950년대 한국 전쟁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1953년 이란 쿠데타 ·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 · 1953년 동독 폭동 사태 ·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 · 포즈난 폭동 · 1956년 헝가리 혁명 · 수에즈 위기 · 스푸트니크 충격 · 우주 경쟁 · 진먼 포격전 · 쿠바 혁명 · 부엌 논쟁 1960년대 콩고 위기 · 중소 분쟁 · U-2기 사건 · 피그스 만 침공 · 쿠바 미사일 위기 · 베를린 장벽 · 베트남 전쟁 · 1964년 브라질 쿠데타 · 미국의 도미니카 공화국 침공 ·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경 전쟁 · 방콕 선언 · 라오스 내전 · 그리스 군사 정권 · 문화 대혁명 · 프라하의 봄 · 헝가리식 공산주의 · 1·21 사태 · 푸에블로 호 납치 사건 · 중소 국경 분쟁 · EC121 정찰기 격추 사건 1970년대 데탕트 · 핵 확산 금지 조약 · 요르단의 검은 9월 · 캄보디아 내전 · 핑퐁 외교 · 베를린 협정 ·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 1973년 칠레 쿠데타 · 에세이사 학살 · 욤키푸르 전쟁 · 전략 무기 제한 협상 · 앙골라 내전 · 모잠비크 내전 · 오가덴 전쟁 · 중국-베트남 전쟁 · 이란 혁명 · 대한항공 902편 ·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 빅토르 벨렌코 망명 사건 198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 아웅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 올림픽 보이콧 · 폴란드 자유 노조 운동 · 이란-콘트라 사건 · 에이블 아처 83 · 전략방위구상 · 미국 그레나다 침공 · 루마니아 혁명 · 1989년 톈안먼 사건 · 노래 혁명 · 베를린 장벽 붕괴 · 동유럽 혁명 ·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해체 ·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 전략 무기 삭감 회의 관련 항목 글라디오 작전 · 글라스노스트 · 매카시즘 · 브리커 개정안 · 철의 장막 · 콘도르 작전 · 페레스트로이카 · 범유럽 피크닉 조직 국가공안국 · 미국 중앙정보국(CIA) · 유럽 공동체 · 코메콘 · 국가보안위원회(KGB) 경쟁 군비 경쟁 · 핵 군비 경쟁 · 우주 경쟁 사상 공산주의 · 마오쩌둥주의  · 스탈린주의 · 자본주의 · 자유 민주주의 · 트로츠키주의 · 주체 선전 기관 자유유럽방송 · 러시아의 소리 · 미국의 소리 · 프라우다 외교 정책 닉슨 독트린 · 도미노 이론 · 레이건 독트린 · 롤백 · 동방 정책 · 봉쇄 · 브레즈네프 독트린 · 아이젠하워 독트린 · 울브리히트 독트린 · 유럽 부흥 계획 · 존슨 독트린 · 카터 독트린 · 케네디 독트린 · 트루먼 독트린 · 평화적 공존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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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참전용사들에게 진빚. 어느 노병의 끝나지 않은 전쟁. 자랑스러운 파월용사님. 전쟁영웅들께 보내는 위문편지. 지덕칠 중사를 ... 통해 린든 존슨 당시 미 대통령에게 전한 친서에서 "한국정부는 월남(베트남)에 있는 한국군인들이 한국음식을 먹을 수만 있다면...




http://www.reportworld.co.kr/paper/view.html?no=2217048

중국-베트남 전쟁

중국-베트남 전쟁, 일컬어 인도차이나 제 3 의 전쟁, 사이에서 1979년에 겪어진 짧고 그러나 살벌한 국경 전쟁은 이었다 중화 인민 공화국 (중공)와 월남 사회주의 공화국. The PRC는 베트남에 응하여 공세를 시작했다 내습과 점령 의 캠보디아, 중공 역행된의 지배를 끝낸 Khmer 루주. ...




http://www.reportworld.co.kr/paper/view.html?search_info=unity_paper%5e1%5e4&no=2343271

Encyclopaedia Britannica: 베트남 전쟁

베트남의 주도로 남·북 베트남이 통일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베트남과 미국이 일으킨 전쟁(1955~75) ( 색인 : 베트남 공산당) ... 1946년 프랑스군과 베트남 독립동맹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전쟁은 1954년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




http://www.reportworld.co.kr/paper/view.html?no=2417071

베트남 전쟁 정보,베트남 전쟁 추천

베트남 전쟁 문맥 정보를 제공하는 블로그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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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전쟁

전쟁은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겪어졌다 베트남의 민주당 공화국 (북 베트남)와 그것의 공산주의자 맹방 및 미국- 지원하는 베트남의 공화국 (남베트남) ... 에 4월 30일, 1975, 남베트남의 자본, Saigon, 효과적으로 전쟁을 끝내는 북 베트남의 공산주의자 힘에, 떨어졌다. ...




http://www.reportworld.co.kr/paper/view.html?no=2578943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베트남전과 한국군

3. 베트남의 게릴라전 상황과 한국 군. 4. 미군과 작전지휘권 협상 및 연합작전. 5. 특기할 만한 한국군의 작전 ... 3.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과 한·미 동맹체제의 변화. 4.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인식 변화와 한국군 파병. 5.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의 문제. 6. 베트남전쟁 참전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 ...




http://www.reportworld.co.kr/paper/view.html?no=2578943

건파워 통합 게시판 -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 명신 장군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 Update 2002/09/12

베트남 전쟁은 한국군에게 있어서 6.25전쟁 이후의 현대전에 대한 중요한 경험과 함께 한국군만의 독자적인 ... 축적하여 베트남 전쟁은 미군이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베트남 전의 특이성과 월맹의 호치민, 남 베트남의 부정부패에 대한 설명을 통해 ...




http://web1.zfile.co.kr/pop.php?sm=bbs_info&idx=6924919

전쟁 베트남전쟁 보고서

그러자 인도차이나 반도를 100년 동안 지배하다 일본에 쫓겨나간 프랑스는 일본의 철수 후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고 군사적 재점령을 시도했던 것이다. 호지명을 지도자로 하는 베트남 인민은 일단 손에 넣은 독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프랑스군..., 62492 ...




http://zfile.co.kr/pop.php?sm=bbs_info&idx=5155148

칼리오페의 은전한닢 :: 베트남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이것 하나만 갖고 있으면 무사했다? 베트남 전쟁월남전기념 ...

제가 어렸을 때 옆동네에 약간은 허름한 아파트가 있었는데, 나라에서 베트남 전쟁 상이용사들을 위해 지어준 아파트였다고 해요. ... 베트남 전쟁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안 할 수는 없는데요. 베트남은 원래 프랑스의 식민지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




http://www.reportworld.co.kr/paper/view.html?no=2064003